역사성을 확신하지 못하는 나라,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이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는 10여 년 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지식인들이 중독(중국의 해독)과 왜독(일본의 해독)과 양독(서양의 해독) 등 3독에 빠져 있으며, 이 3독을 치유하려면 특히 식민사관
역사교과서 왜곡이 문제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1960년대에 이미 일본 역사 교과서의 좌파적 편향 문제가 제기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당시의 집권 세력은 교과서 검정 제도와 교과서 조사관의 권한 강화에 의한 관권이 개입하여 역사 교과
한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에 저해요소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나마 관변측 자료도 풍부한 것은 아니었다. 패전에 임박해 일본 당국이 많은 자료를 소각했음은 이미 알려져 있다. 또한 전쟁이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부터는 해상이 봉쇄되어 관변측 자료마저 식민지 조선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란 말까지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때 ‘아’는 우리 민족과 여진, 선비, 몽골, 흉노를 뜻하며, 비아는 한족을 뜻한다. 즉, 단재 선생님은 역사를 민족과 민족의 투쟁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한국사를 공부할 때는 적잖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
한국사회가 어떠한 역사과정을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이 거시적으로 볼 때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우리 문화의 특색은 어떠한가 하는 등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지난날 우리의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자취를 연구하는 종합적인 학문이다. 두
역사이며 찬란한 문화건설’의 구체적 확인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서술방향은 ‘인민투쟁’을 부각시키는 고구려사가 북한 역사서술의 기본노선임을 의미하고 있으며, 평양 중심의 민족사 전개과정을 통해 고구려사 위주의 고대사 서술을 위한 의도적인 해석의 표현이라 하겠다. 고구려사를 살펴보
4) 송서(宋書)
중국 남북조시대 남송(420~479)의 역사를 담고 있는 송서에는 5세기에 남송에 조공을 바친 왜의 5왕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무왕(武王)이 스스로 왜․백제․신라․임나․가라(가야)․진한․모한 등 7국의 왕을 칭하면서 남송의 황제에게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자
역사학의 발전과저을 살펴보았다.
Ⅱ. 본론(本論)
1. 근대역사학의 성립과 민족주의적 역사의식
우리 역사학이 근대역사학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학문 그 자체로서 근대성을 가져야 하는 학문적 전환과 식민사관에 의한 한국사상(韓國史像)의 왜곡에 맞서야 하는 역사의식의 문제가 전제되어
역사적 측면에서 보게 되면 북방 4개 도서의 영토권 분쟁은 직접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 발생하였다. 최종적인 영토의 경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함으로써 확정되었으며, 그 법적인 기초가 된 것은 전시 중, 그리고 전후 채택된 제문건들이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일본의 영토를 결
1. 단군신화에 대한 이해
// 위서에 말하기를, 2천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을 서울로 삼고, 조선(朝鮮)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대의 일이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옛날에 하늘나라 임금 환인(桓因)의 서자인 환웅(桓雄)은 땅에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것